독서를 할 때 다양한 분야의 책을 접해야 하는데 예전부터 소설책에는 흥미가 생기지 않아서 손이 가질 않았다. 히가시노 게이고 작품처럼 몰입감이 있는 책은 그나마 잘 읽히는데 철학적인 의미를 담은 소설책은 특히나 재미를 느끼지 못했다.
예를 들어 데미안 같은 소설은 대다수의 사람들이 명작이라고 말하곤 하는데 내가 읽었을 때는 솔직히 지루하고 따분한 소설책이었다. 다들 데미안이라는 소설 속에서 철학적인 메시지를 발견하고 작품에 숨겨진 의미를 찾곤 하는데 나에게는 그런 작품 해설능력도 없을뿐더러 억지로 더 깊게 이해하려고 하면 독서라는 행위의 순수한 즐거움도 잊게 되는 것이다.
일본을 대표하는 작가인 무라카미 하루키의 장편소설인 상실의 시대도 작품에 담긴 깊은 의미를 억지로 찾아내야 하는 것은 아닌지 고민을 가지고 책을 읽기 시작했다. 워낙 유명한 작가이기도 하고 소설도 전 세계적으로 찬사를 받은 작품이기 때문에 오히려 작품이 무겁고 이해하기 힘든 면이 있지 않을까 걱정한 것이다. 하지만 내가 이 소설에 담긴 진정한 의미를 찾지 못하였다고 해도 상실의 시대라는 소설은 읽는 동안 내용에 깊게 몰입할 수 있었다. 연애소설 또는 청춘소설이라고 볼 수 있는 이 책을 다 읽었을 때 '죽음'에 대해 좀 더 가까이 생각할 수밖에 없었다.
'죽은은 삶의 반대편 끝에 있는 것이 아니라 우리의 삶 속에 내재해 있는 것이다.'
분명히 그것은 진리였다. 우리는 살아가는 동시에 죽음을 키워가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그것은 우리가 배워야 할 진리의 일부에 지나지 않았다.
(중략)
그 어떤 진리도 사랑하는 사람을 잃은 슬픔을 치유할 수는 없다는 것이다. 그 어떤 진리도, 그 어떤 성실함도, 그 어떤 강인함도, 그 어떤 부드러움도 그 슬픔을 치유할 수 없는 것이다. 우리는 그 슬픔을 실컷 슬퍼한 끝에 그것으로부터 무엇인가를 배우는 길밖에 없으며, 그리고 그렇게 배운 무엇인가도 다음에 닥쳐오는 예기치 않은 슬픔에 대해서는 아무 도움이 되지 못하는 것이다.
소설의 끝에 나오는 이 부분이 소설 전반에 깔려있는 작가의 죽음에 대한 인식을 잘 드러내는 것이 아닐까 생각했다. 사람은 태어나서 반드시 죽음을 맞이하게 된다. 본인이 직접 그 경험을 하기 전에 주위의 수많은 사람들의 죽음을 목격하며 자기만의 '상실의 시대'를 경험한다. 그러나 항상 죽음은 본인과는 거리가 있다고 생각하고 있지만 우리는 '살아가는 동시에 죽음을 키워가고 있는 것'임을 망각한다.
소설의 주인공인 와타나베를 보면서 독자라면 누구나 본인의 경험을 떠올리며 몰입할 것이다. 누구에게나 본인만의 상실의 경험이 있다. 연인이 될 수도 있고, 가족이 될 수도 있고, 친구가 될 수도 있다. 우리의 삶에 있어 '상실'의 경험은 매우 특별한 것이 아니라 보편적인 경험이기 때문에 이 소설 또한 많은 사람들에게 사랑받지 않았을까 생각한다.
소설의 분위기는 매우 가라앉아 있다. 주인공의 감정에 깊게 이입되기도 하고, 나 자신의 경험이 자연스럽게 떠오르기도 한다. 비록 소설의 주인공 같이 애절한 연애사는 없지만 스스로 목숨을 끊은 친구가 생각났다. 그 당시에는 정말 많이 울고 아무런 소용이 없는 원망도 했다. 시간이 지나서 많이 무덤덤해지고 나 살기 바빠서 어느 정도 잊고 지냈는데 책을 읽는 동안 그때의 기억이 떠나질 않았다. 어린 나이에 그런 경험을 하면서 많이 배웠다고 생각했는데 지나 보니 그때의 경험은 아무런 도움이 되지 않았다. 그 어떤 진리도 사랑하는 사람을 잃은 슬픔을 치유할 수는 없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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