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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상과 취미/독서 기록

[독서] 물고기는 존재하지 않는다 - 룰루 밀러

by 김억지 2024. 5. 11.

 

 이 책에 대한 느낀점을 적는 이 순간에도 약간의 벅찬 감정이 느껴진다. 어떤 말로 표현해도 이 책이 가진 깊은 힘을 다 나타내지 못할 것이라 생각한다. 그냥 읽는 내내 압도되는 느낌이 들었고 단 한순간도 지루하지 않았다. 예전에 '본 투 런'이라는 책을 읽을 때 남은 페이지가 점점 줄어드는 것이 아쉬울 정도로 재밌게 읽었는데 그와 같은 감정을 다시 한번 느낄 수 있게 해 준 책이다.

 

 꽤 유명한 책이어서 유튜브나 각종 웹사이트에서 책에 대한 평가나 소개를 접한 적이 있다. 보통 이 책에 대한 생각을 말할 때 반전이 있다는 얘기를 많이 들어서 최대한 사전 정보가 없는 상태로 읽기 위해 애를 썼다. '물고기는 존재하지 않는다'라는 제목이 반전의 핵심 키워드가 될 것이라고 생각하며 읽었는데 오히려 책은 어류 분류학자인 '데이비드 조던'의 삶을 추적하면서 시작된다.

 

 새로운 종류의 물고기를 낚아 유리단지에 보관한 후 이름을 붙여주고 그 표본을 질서정연하게 분류하는 것이 그의 주요 업무였다. 저자인 룰루 밀러가 그의 삶에 주목하게 된 것은 광기에 가까운 열정 때문이라 할 수 있다. 전 세계를 누비며 자신이 처음 발견하고 이름을 붙인 수많은 표본들이 지진과 화재로 소실되어도 결코 낙담하거나 그 일을 포기하지 않았다. 심지어 가족을 잃는 아픔을 겪어도 새로운 물고기를 찾기 위한 여정은 계속되었다.

 

 저자는 이러한 그의 열정적인 여정을 추적함으로써 본인의 삶에 대한 답을 찾기 위해 노력한다. 그렇게 한 가지 일에 몰두한 그의 삶을 파헤쳐보면 본인의 삶을 다시 불타오르게 할 수 있는 무언가를 찾을 수 있다고 생각한 것이다. 데이비드 조던의 여정을 따라가면서 어류를 분류하는 일은 단순한 일이 아니라 그에게 엄청난 의미를 가지는 행위였음이 서서히 밝혀진다.

 

나는 그날 밤 간이침대에 누운 채 잠을 이루지 못하고, 머리 위 나무 서까래들을 응시하며 자신의 세계가 재배열되는 것을 느끼고 있었을 데이비드를 상상했다. 그렇다. 그는 자신이 추구하는 것들을 너무나도 시답잖게 여겼던 어머니와 이웃들, 학우들을 설득할 수 있는 말을 마침내 여기서 발견한 것이다. 데이비드가 손에 꽃을 들고 해왔던 일들은 "무의미"하거나 "소모적"이거나 "야심 없는" 일이 아니었다. 바로 그 저명한 아가시가 정의한바 "가장 높은 수준의 선교 활동"이었던 것이다. 그것은 신의 계획, 생명의 의미, 어쩌면 더 나은 사회를 건설하기 위한 길까지 해독해내는 작업이었다.

 세계 곳곳을 누비며 물고기를 낚아 올려 새로운 이름을 명명하는 것은 데이비드 스타 조던에게 숭고한 행위로 느껴졌을 것이라 생각한다. 단순이 이름을 남기는 것이 아니라 물고기들을 분류하면서 질서를 파악하려 했고, 그러다 보면 자연의 섭리에 가까워질 수 있으리라 생각했을 것이다. 그런데 안타깝게도 이러한 열정의 방향이 올바른 방향으로 나아가지 못했다. 물고기들을 특정 기준에 따라 분류하면서 데이비드 조던은 잘못된 신념을 가지게 된다. 

 

갑자기 남아도는 시간이 엄청나게 많아진 데이비드는 새로운 취미를 찾아냈다. 물고기를 수집하러 여행을 다니는 동안 그는 이탈리아 알프스의 아오스타라는 마을에 몇 차례 다녀온 적이 있다. 그곳에서 그는 충격적인 것을 목격했다. 아오스타는 정신적, 육체적 장애를 지닌 사람들을 보호하기 위한 안식처 같은 도시였다.

(중략)

누군가는 이 마을에서 어떤 아름다움을, 사회에서 가장 취약한 사람들이 존엄을 누리며 살 수 있게 도와주는 근본적으로 인간적인 방식을 보았을 것이다. 그러나 1880년대에 이곳을 방문한 데이비드 스타 조던은 그곳을 "거위보다 지능이 낮고 돼지보다 품위가 떨어지는", "피조물들"이 들끓는 "진정한 공포의 공간"으로 묘사했다.

세월이 흐르는 내내 아오스타 마을은 계속 데이비드의 마음을 불편하게 했다. 그는 그 마을이 루이 아가시가 동물의 세계에서 일어날 수 있다고 했던, 바로 그 퇴화를 보여주는 증거라며 염려했다. 데이비드는 멍게나 따개비 같은 한자리에 고착되어 살아가는 생물들이 한때는 물고기나 게처럼 더 높은 차원의 형태를 갖고 있었으나 기생으로 자원을 획득해온 결과 더 게으르고 더 약하고 더 단순하며 더 지능이 떨어지는 생명체로 "퇴화했다"는 잘못된 믿음을 갖고 있었다.

 

 이러한 잘못된 신념은 엄청난 파급력을 가지게 된다. 자신의 생각을 세상에 널리 알리기 위해 책을 썼는데 이 책을 통해 '으생학'이라는 단어가 널리 알려지게 된 것이다. 우생학이 사전적 정의는 '인류를 유전학적으로 개량할 것을 목적으로 하여 여러 요건과 인자들을 연구하는 학문'이다.

 

 그가 분류학자로서 뛰어난 업적을 남긴 것은 분명하다. 하지만 그가 열렬한 우생학 지지자였던 것은 분류학자로 살아오면서 그에게 잘못된 신념이 형성되었기 때문이라 생각한다. 그저 겉모습과 특성이 구분되는 것들을 단순히 '분류'하는 것이 아니라 어떠한 계층 구조가 있다고 생각했을 것이다. 멍게나 따개비를 낮은 차원의 생물이라 생각했듯이 모든 생물을 '자연의 사다리'가 존재한다고 생각하고 분류하고, 그 사다리의 가장 높은 곳에는 인간이 존재한다고 믿었을 것이다.

 

 데이비드 조던의 열렬한 지지로 인해 미국 전역에 우생학이 알려지고 인류의 유전학적 개량을 위한 잔인하고 비도덕적인 행위들이 곳곳에서 시행되었다. 우생학에 대한 이야기는 나치의 홀로코스트에서나 들을 수 있는 것이라 생각했는데 20세기 미국에서도 우생학이 성행했다는 사실은 매우 충격적으로 다가왔다. 

 

 이렇게 열정적인 분류학자의 삶을 추적하면서 그 이면에 감춰진 어두운 면을 밝혀내는 과정은 마치 추리소설을 읽는 듯했다. 한 분야에서 권위를 가진 인물의 잘못된 신념이 사회에 큰 파장을 불러일으키는 과정을 보며 지금 내가 보고 느끼는 모든 것들에도 얼마나 많은 오류가 있을까 생각한다. 

 

 마지막으로 책의 제목에 대해 이야기 하자면 말 그대로 물고기는 존재하지 않는다. 처음에는 이게 무슨 엉뚱한 소리인가 했다. 최근의 과학 연구에 따르면 우리가 알고 있는 '어류'라는 분류는 분류학적으로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단지 인간이 직관적으로 이해하기 쉽기 때문에 '어류'라는 이름을 붙였을 뿐이다.

 

 '보이는 것이 다가 아니다'라는 말을 많이 듣는다. 아마 인간들이 '어류'라는 분류를 만든 것은 '보이는 것이 전부다'라는 생각의 결과가 아닐까 생각한다. 자연과 사회에 존재하는 수많은 이름들은 결국 인간이 지은 것이고 모든 것은 다 인간을 중심으로 정의된 것이다. 우리의 편의를 위해, 또는 인간이 가지는 우월적 지위를 유지하기 위해 얼마나 많은 오류가 범해졌을지 상상해 본다. 

 

 서점을 가면 책도 분류가 되어 있다. 책의 분류가 모호하다고 느낀 책이 간혹 있는데 이번에 읽은 '물고기는 존재하지 않는다'라는 책이야말로 정말로 분류하기 힘든 책이라 생각한다. 전 장르를 넘나드는 내용을 따라가다 마지막에 다다랐을 때 머리가 멍해지는 기분을 들었다. 책에게 압도당한 것 같기도 하고 생각이 많아지게 하는 책이라 여운이 아주 길었다. 실생활에서는 잘 쓰지 않는 표현이지만 '양서'라는 말이 딱 어울리는 책이라 느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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