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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상과 취미/독서 기록

[독서] 밝은 밤 - 최은영

by 김억지 2024. 3. 18.

 

 책의 구입을 결정하는 데에는 여러 가지 이유가 있다. 직접 읽어보고 판단하거나 대중의 평가를 기준으로 삼는 경우가 대부분이지만 책의 표지가 눈길을 끌 때가 있다. 다소 무식해 보이기도 하지만 내용을 전혀 보지도 않고 표지만 보고 구입했던 적이 있다. '쇼코의 미소'라는 책인데 표지만 보고 구입했음에도 정말 재밌게 읽었던 기억이 난다. 내용을 모두 다 기억하는 것은 아니지만 등장인물들의 감정을 직접적으로 묘사하지 않고도 마치 내가 그 상황의 주인공이 된 것 마냥 세세한 감정선이 느껴지는 소설이었다. 그 책을 통해 최은영이라는 작가를 알게 되었고 '밝은 밤'이라는 소설에도 흥미가 생겨 구입하게 되었다.

 

 이야기의 시작은 마치 추리소설 같았다. 마음의 상처가 깊은 '지연'이라는 인물이 희령이라는 곳으로 이직을 하게 된다. 지연은 어릴 적 할머니를 만나기 위해 잠시 희령에 왔던 적이 있으나 할머니와 어머니가 교류가 없어 그 이후로는 할머니를 만난 적도 없고 희령이라는 곳에 온 적도 없다. 그런데 우연히 같은 아파트에서 할머니를 만나면서 이야기가 시작된다.

 

 할머니와 손녀 관계지만 오랜만에 만나 어색하기만 하지만 우연한 기회로 할머니를 통해 증조모에 대한 얘기를 듣게 된다. 이북에서 백정의 딸로 살면서 겪은 수많은 고초와 그의 딸인 할머니로 이어지는 삶의 이야기를 들으면서 지연은 할머니로부터 위로를 받는다.

 

 책을 읽으면서 제목인 '밝은 밤'의 의미가 무엇 일지에 대해 계속 생각하게 되었다. 작가의 의도가 무엇인지는 모르겠으나 두 가지의 뜻을 떠올리게 되었다. 첫 번째는 어둠만 존재하던 밤에서 '점점 밝아지는' 과정이지 않을까 생각했다. 이혼과 가족을 비롯한 주변 사람들의 시선으로 상처받은 지연이 할머니를 통해 위로 받으면서 어둠에서 벗어나게 되는 모습이 상상되었다. 책의 표지에서 손으로 빛을 가리고 있는데 언젠가 손을 내리게 되면 그때가 밤이 끝나는 시기라 생각한다.

 

 두 번째는 '밝은 밤'이라는 두 단어의 조합을 상상했을 때 떠오르는 이미지다. 주변에는 아무것도 없고 파도소리만 들리는 바다에 환한 보름달이 바다를 비추고 있는 모습이 떠오른다. 상처받고 괴로운 마음을 위로해 주는 달빛이 증조모부터 지연까지 이르는 4대에 걸친 여자들의 든든한 조력자 같다는 생각을 했다. 특히 증조모에게는 '새비 아주머니'라는 인물이 증조모를 비춰주는 달빛이라고 느꼈다.

 

 새비 아주머니는 증조모가 이북에 있을 때부터 힘이 되어준 인물인데 이 둘의 우정과 사랑은 정말 슬프면서도 감동적이었다. 둘의 인생에서 고통과 인내의 시기만 가득했지만 그 때문에 서로의 존재는 더욱더 소중하고 빛나게 느껴졌다. 힘들고, 서럽고, 한 많은 인생이지만 이런 감동적인 우정을 간직한 삶은 결코 부족하거나 가볍게 보이지 않았다.

 

 증조모의 달빛이 새비 아주머니라면 할머니를 비춰주는 달빛도 있다. 새비 아주머니의 딸인 '희자'가 있는데 희자보다는 할머니의 얘기를 들어주는 지연이가 더 가깝지 않나 생각한다. 우연히 할머니를 만나 점점 마음의 생채기가 아물어가는 지연의 모습도 그려지지만 그것보다는 자신이 과거 겪었던 과거를 손녀에게 얘기해주면서 마음을 회복하는 할머니의 모습이 더 선명했다.

 

 4대에 걸친 모녀지간의 얘기는 명확한 결말보다는 얼마간의 상상과 추측을 머금고 끝난다. 마치 꼬깔 모양의 타워를 나선형으로 타고 올라가다가 정상에 다다르기 전 멈춘다는 느낌이다. 이후에 이어지는 얘기를 작가가 직접 얘기해주지는 않지만 어느 정도는 상상을 할 수 있다. 적어도 '어두운 밤'이 올 것 같지는 않다.

 

 쇼코의 미소를 읽고 나서 미소 짓고 있는 쇼코의 진짜 마음이 어떨지 상상하는 여운이 남았듯이 이번 소설도 강한 여운을 남긴다. 등장인물의 감정에 이입되기도 하고 묘사하고 있는 당시의 시대적 상황에 대해 몰입하기도 했다. 최은영 작가는 책 후반에 있는 작가의 말에서 이 소설이 자신만의 생명으로 누군가의 마음에 잠시나마 함께할 수 있기를 바란다고 했는데 꽤 오랜 기간 동안 마음에 자리 잡고 있을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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