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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상과 취미/독서 기록

[독서] 힘 빼기의 기술 - 김하나

by 김억지 2024. 2. 26.

 

 며칠 전 방에서 조용히 책을 읽다가 배가 고파서 거실로 나왔다. 그런데 와이프가 소파에 앉아 티비를 보면서 눈물을 흘리고 있었다. 무슨 큰 일이라도 있는 것 같아 뭐를 먹어야겠다는 생각은 뒤로 하고 일단 와이프 옆에 앉아서 무슨 상황인지 파악하려고 했다. 알고 보니 와이프는 '연인'이라는 드라마의 요약 편집 영상을 유튜브로 시청 중이었는데 너무 슬프다면서 눈물을 흘리고 있었던 것이다.

 

 눈물의 원인이 내가 아니라서 다행인가 싶다가도 울고 있는 와이프를 놔두고 굶주린 내 배만 채우는 게 뭔가 바람직한 모습은 아닌 것만 같아 와이프 옆에 앉아 같이 영상을 보았다. 그런데 옆에 가만히 있어주려고 했던 나까지도 그 영상에 빠져들면서 마지막에 이르러 남자 주인공이 기억을 되찾는 대목에서 나도 저항 없이 눈물이 뚝뚝 떨어졌다.

 

 스스로 이성적인 사람이라고 생각하다가도 평소 눈물이 많은 나의 모습을 보면 감정적인 사람인가 싶기도 하다. 장례식장은 물론이고 결혼식에 가서도 쉽게 눈물이 나곤 한다. 그런데 드라마를 보고 감정이입을 해서 눈물을 흘리는 건 당최 이해가 되지 않았다. 드라마는 허구의 이야기인데 어떻게 그렇게 몰입할 수 있는지 신기하다는 생각까지 할 정도였다.(드라마를 좋아하지 않는 나는 태어나서 단 한 번도 하나의 드라마를 처음부터 끝까지 다 본 적이 없다.)

 

 그렇게 드라마와는 가깝지 않던 내가 유튜브 편집 영상을 보면서 그렇게 눈물이 나는 게 참 기분이 이상했다. 남자가 나이가 들면 여성호르몬이 많이 분비돼서 감정이 풍부해지고 눈물이 많아진다는 얘기는 어디서 들어본 것 같은데 벌써 내가 그럴 나이가 된 건가 싶기도 하다. 드라마를 보고 눈물을 흘린다는 것이 부끄러운 얘기도 아니고 다르게 생각하면 감정이 풍부해졌다고도 볼 수 있으니 일단은 긍정적인 현상이라고 느꼈다.

 

 그날의 경험은 하루로 끝나지 않았다. 평소 책을 읽고 나면 다시 읽을 책과 그러지 않을 책을 구분해서 정리하는데 요즘은 책을 새로 사는 것을 자제하고 예전에 읽었던 책을 하나씩 다시 읽고 있는 중이다. 이번에는 어떤 책을 읽어볼까 하는 마음으로 책장을 보는데 그날따라 와이프의 책장이 눈에 들어왔다. 와이프와 나는 다른 취향은 참 비슷한데 독서만큼은 취향 차이가 확연하게 드러난다. 경제나 사회과학 분야의 책을 읽고 있는 내 모습을 보면 와이프는 그 재미없는 걸 어떻게 읽냐고 하고 에세이나 산문집을 읽고 있는 와이프의 모습을 본 나는 그런 시시한 책을 어떻게 읽냐고 한다.

 

 이런 취향 차이로 인하여 와이프의 책은 쳐다보지도 않던 나에게 어느 순간부터 눈길이 내가 구입한 책들이 아닌 다른 쪽으로 향하게 된 것이다. 도대체 이런 책은 왜 읽는 건가 싶었던 책들을 보면서 기분 좋은 마음의 편안함이 느껴졌다. 그러다가 책 구입하는데 비용도 부담스러운데 그냥 와이프가 산 책들을 읽어보자는 마음에서 책 한 권을 꺼내 주말 동안 읽게 된 것이다.

 

'힘 빼기의 기술이라니, 도대체 무슨 내용일까 궁금했다. 책의 첫 부분에 있는 프롤로그를 보면 저자가 어떤 삶의 태도를 가지고 있고 어떤 인생을 지향하는지 알 수 있었다. 그 프롤로그가 이 책의 내용을 대변하고 있음과 동시에 독자로서 어떤 마음가짐을 가지고 이 책을 읽어야 할지 알려주는 것 같았다.

 

사람들은 힘들어하는 이에게 응원의 뜻을 담아 "힘내라!"라고 말한다. 물론 좋은 마음에서 하는 말이겠지만 차라리 "힘 빼라!"라고 말해주는 게 나을 때도 있다. 안전망은 부실하고 사람들의 힘을 쥐어짜내어 굴러가는 이 폭력적인 나라에서 그저 하루하루 살아가는 것만 해도 힘에 부치는데 또 힘을 내라니. 도대체 언제까지? 물속에서 수영하다 온몸에 힘이 빠져 허우적대는 사람에게는 "힘내라!"라고 하면 안 된다. 그때는 힘을 더 소모하지 말고 온몸에서 힘을 빼 둥둥 떠 있어야 한다. 계속 힘을 내려다가 결국 가라앉는다. 힘이 부치는 사람에게 힘내라고 하기보다 손을 내밀어 나의 힘을 보태고 우리의 힘을 합칠 일이다. 흔히 인생은 마라톤과 같다고 한다. 그러니 어떻게든 더 힘을 내서 완주하려고 응원하게 되는지도 모른다. 나는 이 비유를 썩 좋아하지 않는다.

 책의 저자인 김하나 수필가를 간단하게 소개하자면 훌륭한 커리어를 쌓아 온 카피라이터이다. 카피라이터라는 직업을 가진 사람은 모두 글을 잘 쓰고 감정이 풍부할 것이라는 생각도 편견이겠지만 적어도 어떤 마음가짐으로 세상을 바라보고 느끼는지 책을 통해 나에게 전달되었다. 에피소드를 하나씩 읽어가면서 저자의 표현에 감탄했던 적이 많은데 짧은 문장이지만 그 속에 담겨있는 감정과 표현력을 만끽하는 것도 이 책을 읽는 재미 중 하나였다.

 

 박웅현 님께서 쓰신 '책은 도끼다'라는 책이 있다. 가볍게 읽을 수 있으면서도 독서의 즐거움을 너무나도 잘 알려주는 책이라 여러 번 반복해서 읽게 된다. 그 책에서 저자는 '촉수가 예민한 사람'이 되고 싶다고 하는데 김하나 수필가님이야말로 촉수가 예민한 사람이 아닐까 싶다. 일상의 소중함과 즐거움을 느끼고 자연이 주는 아름다움을 있는 그대로 만끽하는 사람. 내가 지향하는 삶의 자세이지만 이게 생각하는 것만큼 쉬운 일이 아니다. 부단한 노력을 필요로 하는데 이 책을 읽는 동안은 나의 촉수들이 한껏 예민해진 기분을 느낀다.

 

  책의 제목이 '힘 빼기의 기술'이라고 해서 뜬 구름 잡는 이론들로 어떻게 해야 힘을 뺄 수 있다고 가르쳐주는 책은 아니다. 그저 남들과는 다르게 인생을 풍부하게 즐기고 느끼는 저자의 에피소드를 읽으며 나 또한 저절로 '힘을 빼게' 된다. 그런 의미에서 '힘 빼기의 기술'에서 이 '기술'이라는 단어가 '사물을 잘 다룰 수 있는 방법이나 능력'을 의미하는 '기술(技術)'을 뜻하는 것이라고 생각했는데 다 읽고 나니 단순히 본인의 경험과 감정이 잘 서술된, '기술(記述)'이라고 생각한다. 때로는 이론적인 가르침보다 그저 보고 느끼는 것이 더 효과를 발휘하는 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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